::: 학술단체협의회 :::

입력 : 2010-02-01 18:06:45

ㆍ“국민·참여정부때 주류 편입한 사회학자들 반성해야”

1988년 진보적 학술단체들이 연합해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민주화와 함께 진보적 연구자들이 대학에 자리 잡으면서 한국사회에 큰 존재감을 남기지 못했다. 이는 제도 밖에 있던 야성(野性)이 제도로 편입되며 겪을 수밖에 없는 과정이기도 했다. 진보적 학문이 민주화의 몫을 나눠 갖고 ‘학문적 시민권’을 얻은 것까지는 좋았다 해도, 진보적 연구자들이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난해 말 김누리 중앙대 독문과 교수 등이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한국연구재단의 연구지원 선정에 탈락하자 많은 교수들이 ‘확 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번에 학단협 새 대표를 맡은 조돈문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56·사진)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학문 주류에 편입된 사회과학자들의 반성이 절실하다”고 했다. 역사문제연구소, 비판사회학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회경제학회 등 27개 학술단체, 5000여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학단협이 어떻게 다시 존재감을 찾을지 조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학단협을 소개해 주시지요.

“진보적인 연구자들은 87년 민주화를 전후해 개별 학회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여전히 진보적 연구자들이 탄압을 받던 상황이었지요. 진보적 학술공동체를 보호하고 사회적 발언을 하기 위해서는 학술 연구자들 내에 자립적인 연합이 필요했죠. 그래서 이들 개별 학회를 묶는 학단협이 만들어졌습니다.”

- 하지만 지금은 학단협이 존재감이 없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학단협은 그간 진보적 학술단체들의 네트워킹에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지나면서 사회가 많이 민주화되었고, 진보적 연구자들도 국가에 의해 큰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어졌어요. 국가의 학문정책이 정상화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거지요. 그래서 학단협의 역할이 줄어든 대신 개별 학회 단위의 활동이 많아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 배제되었던 진보적 연구자들이 정부 부처의 장관이나 위원회에 참여하는가 하면 국가가 발주하는 연구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처럼 정부를 정면 비판하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생겼지요. 정부에 참여했거나 프로젝트를 수행한 진보적 성향의 연구자들은 주로 사회과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과학자들은, 일관되게 민주 정부의 한계를 지적해온 인문학자들과 비교할 때 본연의 임무를 방기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 그것이 보수정부가 들어선 지금도 문제라고 봅니까.

“그렇지요. 진보적 학자들이 장관직이나 위원회에 참여하는 경우는 없어졌지만 연구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연구 프로젝트란 게 1년이 아니라 3년 혹은 5년 이상 지속되는 것도 많기 때문이지요. 한국연구재단이라는 표면상 중립적 기구의 심사절차를 거쳐서 받기 때문에 직접 국가로부터 받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과학자들 상당수가 여전히 정부 비판을 자유롭게 하기 어려운 조건에 있는 것입니다.”

- 그것이 전적으로 연구자들 탓일까요.

“이전에는 연구계획서가 엉망이어도 연구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투명한 절차로 선정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김누리 교수 등이 공정한 절차를 거쳐서 1위로 올라갔지만 석연찮은 이유로 배제되는 일이 일어났지요. 실무자들이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체계적으로 블랙 리스트를 갖고 선별하는 절차가 개입되었다는 뜻입니다. 올해부터 한국연구재단 선정 프로젝트 책임자들을 비교해 보면 일회적 현상인지, 구조적인 변화의 시작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구조적 변화라면 이것은 분명 20년 전 학단협이 만들어질 때의 상황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거기에 단호히 맞서야 하는데, 개별 사회과학자들이 그걸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단협은 올해 한국연구재단 심사 절차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과거와 비교해서 비이성적인 것이 있으면 체계적으로 대응할 계획입니다.”

- 합리성을 표방하는 ‘학진 체제’의 문제는 없나요. (한국연구재단은 인문·사회과학 연구를 지원한 구(舊) 학술진흥재단과 자연과학 연구를 지원한 구 한국과학재단 등이 통합돼 2009년 만들어졌다.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은 학술진흥재단이 연구 지원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는 것을 ‘학진 체제’라고 부른다.)

“학진 체제 자체에는 일정한 진보성이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것이 개별 연구자보다는 대학과 연구소 등 대형 프로젝트 단위로 지원해주다 보니 거기 참여한 젊은 박사 연구자들이 자기 관심사보다는 팀 작업의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한 지난 정부 하에서 학진을 좀 더 자율성 높은 독립 기구로 만들지 못해 정치적 입김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 국가의 학문 정책이 편향되어도 대학이라도 제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수도권 대학만 봐도 진보적 연구자들을 재생산할 수 있는 틀이 많이 무너져 있습니다. 정규직 교수로 있는 진보적 연구자가 많이 퇴직했지만, 그 자리는 진보적 연구자들로 채워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시 진보적 커리큘럼이 줄어들게 되고, 학부나 석사과정에서부터 진보적 커리큘럼을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의 욕구도 충족되지 못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학단협 산하 학회 단위별로 소모임을 통해 대학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 하고 있습니다.”

- 대학의 문제는 단순히 진보적 지식인 충원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한국사회 전반이 신자유주의화하면서 대학이 인격 형성의 배움터라기보다 취업학원이 되어가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업들이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고, 정부가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학생들도 그런 기초적인 배움에 대해 기대를 하지 않고 있고, 대학도 그런 프로그램을 줄이고 기업이 요구하는 것을 가르치려 합니다. 교수는 취업지도 교사가 된 지 오래입니다. 취업에 진보적인 커리큘럼이 도움이 되지 않고, 기업은 비판적 지성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기업은 명령을 받고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을 요구할 뿐이지요.”

조 교수는 학단협 대표이기 전에 라틴아메리카학회에 속한 중남미 연구자이다. 최근 그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브라질 노동운동과 룰라 정부를 분석한 <브라질에서 진보의 길을 묻는다>(후마니타스)라는 연구서를 냈다.

- 브라질에 대한 관심은 어디서 비롯되었습니까.

“브라질에 노동자당이 만들어지던 80년부터 브라질을 눈여겨 봤어요. 2002년 대선에서 룰라가 당선될 것을 예감하고, 늦은 나이에 포르투갈어를 새롭게 배웠습니다. 룰라 당선 직후 세계사회포럼 장소인 포르투 알레그레에 가서 노동자당이 가진 힘을 확인했어요. 포르투 알레그레는 노동자당이 이미 시 정부를 운영하던 곳입니다. 시민들이 예산 배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참여예산제’를 실시해 성공했고, 그 성공의 경험이 브라질 전역으로 퍼져서 룰라가 집권할 수 있었어요.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진 상황에서 다른 방식의 새로운 변혁 모델로 좌파 집권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심어주었지요.”

- 룰라가 2006년 재선에 성공한 것을 두고 ‘룰라의 배신인가, 성공한 민주주의 모델인가’ 묻게 되는데요.

“룰라 정부가 변혁적 실험을 하지 못한 것은 맞습니다. 그렇다고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정부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집권했을 때엔 외채와 공공부채의 규모가 엄청났고, 통화가치가 불안정하며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각한 상황이었지요. 집권 기간 중산층 이상 계급의 반발을 무릅쓰면서도 대체로 노동계급의 요구를 반영했기 때문에 재선에 성공하고 70% 수준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거죠.”

- 룰라와 노무현은 자주 비교되었는데요, 무엇이 두 인물의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지지 기반의 차이입니다. 대통령은 전체 국민을 대변하지만 그중에서도 자기를 지지한 사람을 가장 적극적으로 대변합니다. 노무현은 계급적 지지 기반이 약했고, 룰라는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룰라는 노동계급에 역행하는 정책을 펼 수 없었지만, 노무현은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집권 3~6개월 만에 철도파업, 전교조와 충돌했고, 집권 기간 내내 노동자들의 죽음이 이어졌습니다. 룰라였다면, 설사 그가 배신자였다고 해도,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서 통곡했을 겁니다. 노무현은 노동자 10명이 연달아 죽어나가는데도 노동자들의 주검을 향해 모진 말을 내뱉었습니다. 저도 사실 그런 태도에 깜짝 놀랐어요. 총파업 투쟁을 펼치면 정부는 그걸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했죠.”

조돈문 교수는 한국에서 브라질의 노동자당과 같은 것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라고 단언했다.

▲ 조돈문은
그가 내민 명함에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공동대표/이사장’만 적혀 있다. 가장 마음에 담고 대변하려는 단체가 비정규직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그가 가장 미안해 하는 집단이기도 하다. 미국 위스콘신매디슨 대학에서 한국과 멕시코의 노동계급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미국식 사회과학이 한국 대학사회를 주름잡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공부와 활동을 넘나드는 바쁜 일정 속에 철원 철새 도래지 등에 나가서 새 사진 찍는 일을 유일한 숨통 틔우는 일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