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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단협 ‘5·18과 미완의 민주화’ 학술대회

“물신주의 비판하면서도 역전시킬 동력 부족”
분배에 기반한 성장모형등 대안 구체화해야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성장해 온 한국의 진보세력은 1990년대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뚜렷한 대안 담론을 잃고 분열됐다. 각종 규제완화를 통한 민간분야의 확장이란 이름 아래 사회 공공성을 해치고 비정규직화, 실업 등 양극화를 확산시켜 온 ‘신자유주의’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주요 성장동력으로 위력을 떨쳐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세계 각국에서 터져나오면서 대안 담론이 세계 각국에서 분출하는 상황이다. 한국에서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정치적 민주화마저 후퇴하는 현상까지 나타나, 그 어느 때보다 ‘새로운 진보 담론’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으나 똘똘한 대표선수가 출현하지 못한 상황이다.

한국학술단체협의회는 지난 16일 서울 동국대에서 ‘5·18과 미완의 민주화: 민주주의 위기와 사회 경제적 퇴행’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큰 첫걸음인 광주항쟁 30돌을 맞아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민주주의 위기 상황을 진단하고, 이에 대한 진보세력의 대안이 무엇인지 논의해보는 자리였다.

1987년 6·10항쟁 뒤로 절차적 민주주의는 자리를 잡아갔지만, 각 분야의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등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퇴행했다는 사실은 많은 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본적인 현상 인식이다. 다만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분석과 대안이 저마다 갈리고 있다.

안현효 대구대 교수와 류동민 충남대 교수는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의 전개와 이론적 대안에 관한 검토’ 발표에서 ‘87년체제론’에 입각해 “한국의 신자유주의는 보수주의 우파가 박정희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삼은 정치적 기획”이라고 분석했다. 87년 이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자유주의 세력에 장악돼, 김대중·노무현 등 자유주의 정부 아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도입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2007년에는 결국 보수주의에 그 헤게모니를 넘겨줬다고 본다.

이런 배경에 따라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틀어쥔 보수주의에 대한 대항으로 자유주의는 급진화하고 사회주의는 온건화해, 다양하게 분열된 진보세력의 대안들도 어느 한 방향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두 교수는 동반성장론, 제3의 길,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 역동적 복지국가론, 사회국가론, 기본소득론 등 다양한 대안들의 내용을 살핀 뒤, “많은 차이가 있지만, 점차 사회민주주의적인 보편적 복지론으로 통일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지향에서는 저마다 차이가 있지만 “분배에 기반한 성장모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두 교수는 “진보세력들이 각자의 다양성을 지키면서도 연대를 통해 중앙정치 차원의 구체적 대안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정주 경상대 교수는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발표를 통해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실질적 내용이 없는 ‘의사민주주의’”라며 진보세력이 더욱 근본적 차원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박정희 체제 때부터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대중들은 경제적 과정에 동원되면서도 그로 인해 축적된 물질적인 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거나 통제하지 못하게 끊임없이 배제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때문에 대중들은 정치적 요구에는 목소리를 높일지언정, 세금·주택·교육 문제 등 경제적 문제 앞에서는 개인적인 욕망에 충실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의 진보세력은 물신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힘이 어떤 제도적, 역사적 조건으로부터 오는지 무관심했다”며 “사회적 부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실질적 지배와 통제의 범위를 확장해가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주장했다.

이날 미시적 영역에서 진보 운동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3부 순서가 특히 관심을 모았다. 자유주의 정권의 실패에 이어 보수주의 정권이 재집권한 지금, 거시적인 담론만으로는 지속가능한 진보를 이어갈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강현수 중부대 교수는 참여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인도 케랄라 지역의 사례를 들어, “우리나라 진보는 중앙에서도 열세지만, 생활현장인 지역에서는 훨씬 더 열세”라고 지적했다. 지역 단위에서 다양한 진보적 주체가 있다면, 중앙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더라도 얼마든지 대안과 실천을 펼쳐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2년 전부터 진보정당 지역협의회 및 지역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이 함께 모여 서울 마포 지역에서 시작한 ‘민중의 집’ 운동도 관심을 끌었다.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등 유럽에 활성화되어 있는 민중의 집은 정당과 노동조합, 협동조합, 청년 조직 등 다양한 지역 주체들이 교류하는 장소로, 진보운동이 실질적으로 이뤄지는 현장이다. 정경섭 공동대표는 “그동안 우리 진보운동에 없었던 ‘현장’을 되살려, 일상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진보운동의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민이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게 하는 협동조합 운동의 중요성도 부각됐다.

조돈문 학술단체협의회 상임대표는 “대안은 아직 뚜렷하진 않지만, 더이상 국가권력을 매개로만 삼아 진보운동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해졌다”며 “앞으로 생활현장에서 이뤄지는 실천적인 운동 속에서 진보적 대안을 발견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사진 한국학술단체협의회 제공